과도한 가족주의가 비혼 늘리고 출산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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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5-19 15:15 조회1,864회 댓글0건본문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비혼은 증가 중이고 출산은 급감 중이다. 통계청의 ‘2022 사회조사’에 따르면 미혼 남녀의 70%가 결혼은 필수 아닌 선택이라고 응답했다. 아예 비혼식(非婚式)까지 거행하는 젊은이가 적지 않아 비혼 직원과 기혼 직원을 똑같이 대우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한편 출생아 수는 올해 초 드디어 월 1만명대까지 떨어졌다. 이에 합계 출산율은 매년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다 가정은커녕 나라도 사라질 판이다.
결혼 회피와 출산 기피 요인으로는 경제가 으뜸이었다. 취업하기도 어렵거니와 월급으로 내 집 마련이나 자녀 부양은 더욱 더 어렵다는 것이다. 작년 말 전경련이 발표한 ‘체감경제고통지수’에 따르면 청년층의 경제적 고충이 다른 모든 세대를 능가했다. 얼마 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주택 가격 상승이 출산율 저하에 미치는 영향을 통계적으로 확인했는데, 무주택자는 출생아 감소 폭이 특히 더 컸다. 그래서 ‘결혼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라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소설가 김영하). 아마 출산도 사정이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중산층부터 크게 흔들리는 시대다. 결혼과 출산의 진입 장벽을 자유롭게 넘는 사람들은 결국 일부 상류 계층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이를 상징하는 신조어는 ‘판교 신혼부부’다. 부유한 양가 도움으로 판교에 30평대 아파트를 소유한 젊은 남녀로서, 부모 덕에 좋은 교육을 받아 IT 관련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대기업에 근무하는 가운데, 근처 유명 백화점 지하에서 시장을 보고 주말이면 어린 자녀와 함께 고급 카페테리아에서 브런치를 즐긴다고 한다. 말하자면 전통적 강남 부자의 속편(續篇)이다.
능력 있는 부모가 자식을 밀어주고 자식은 이에 대해 성공으로 보답하는 그들 세계 나름의 가족주의는 신분 상속과 특권 세습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부모 자식 사이가 ‘관계적’이라기보다 ‘도구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곧, 독립된 인격체로서 서로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부모는 자식의 도구, 자식은 부모의 도구에 가깝다는 의미다.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적 가족 관계가 관계적 가족으로 이행하지 못한 것은 재산의 대물림 관행과 더불어 자녀를 대리 만족 내지 투자 대상으로 인식하는 풍조 때문이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초등학교 4학년 대상 의대 입시반까지 생길 정도로 번창한 사교육 시장, 집중력 향상을 위해 청소년들에게 약물성 드링크까지 먹이는 교육열, 주택을 위시한 자녀들의 기초 생활 인프라를 일거에 구축해 줄 수 있는 경제력, 그리고 출가한 자녀들이 계속 강남에 살 수 있도록 상대 ‘배후자’(배우자가 아님·구해근 ‘특권 중산층’)를 같은 강남에서 물색하는 혼인 전략은 ‘강남스타일’ 계급 재생산의 대표적 레퍼토리다. 이 점에서는 진보·보수 차이도 없다. 이런 가운데 이른바 인생 로또에서 ‘부모 뽑기’에 실패한 대다수 청년의 좌절감과 박탈감은 깊어져만 간다.
1970년대 중반 ‘월튼네 사람들’이라는 외화(外畵)가 국내에서 방영된 적이 있다. ‘전원일기’류의 훈훈한 가족 드라마였는데, 10여 년 뒤 미국 유학 시절, 우리말 더빙 없는 원작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극중(劇中) 대사에서 한국식 경어(敬語)가 사라지자 미국의 가족 내 인간관계는 친구처럼 편한 모습으로 달라져 보였다. 실제 서양 가정은 대개 그렇다. 최소한 그때는 그랬다. 가족들이 서로를 도구화하는 대신 각자 주체적·자립적 삶을 지향한다. 부모 자식 간에 특히 의존할 일도, 별로 기대할 일도 없다. 주거비나 양육비 부담이 청년들의 사회 진출 문턱을 터무니없이 높이지도 않는다.
한국의 가족 제도가 자랑하는 효 문화에는 거래적 측면이 은밀히 작동해 왔다. 언제부턴가 그게 점점 심해져 효는 조만간 가족 간에 주고받을 것이 많은 일부 부잣집 윤리로만 재정의될지 모른다. 작금의 효 문화로는 모두 패자가 될 공산이 높다. 못난 부모를 만나 이번 생은 망했다고 한탄하는 흙수저가 물론 많지만, 잘난 부모 탓에 인생이 망가졌다고 원망하는 금수저도 적지 않다. 우리 사회가 비혼을 줄이고 출산을 늘리려면 과도한 도구적 가족주의와 헤어질 연습부터 해야 한다. 덤으로 사회 갈등의 감소까지 기대할 수 있다. 당연히 이는 내 자식 내 마음대로, 내 재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기득권 사회 지도층이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 그들 자신도 국가 공동체 안에서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워낙 그런 의미다.(조선일보발췌)
결혼 회피와 출산 기피 요인으로는 경제가 으뜸이었다. 취업하기도 어렵거니와 월급으로 내 집 마련이나 자녀 부양은 더욱 더 어렵다는 것이다. 작년 말 전경련이 발표한 ‘체감경제고통지수’에 따르면 청년층의 경제적 고충이 다른 모든 세대를 능가했다. 얼마 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주택 가격 상승이 출산율 저하에 미치는 영향을 통계적으로 확인했는데, 무주택자는 출생아 감소 폭이 특히 더 컸다. 그래서 ‘결혼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라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소설가 김영하). 아마 출산도 사정이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중산층부터 크게 흔들리는 시대다. 결혼과 출산의 진입 장벽을 자유롭게 넘는 사람들은 결국 일부 상류 계층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이를 상징하는 신조어는 ‘판교 신혼부부’다. 부유한 양가 도움으로 판교에 30평대 아파트를 소유한 젊은 남녀로서, 부모 덕에 좋은 교육을 받아 IT 관련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대기업에 근무하는 가운데, 근처 유명 백화점 지하에서 시장을 보고 주말이면 어린 자녀와 함께 고급 카페테리아에서 브런치를 즐긴다고 한다. 말하자면 전통적 강남 부자의 속편(續篇)이다.
능력 있는 부모가 자식을 밀어주고 자식은 이에 대해 성공으로 보답하는 그들 세계 나름의 가족주의는 신분 상속과 특권 세습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부모 자식 사이가 ‘관계적’이라기보다 ‘도구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곧, 독립된 인격체로서 서로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부모는 자식의 도구, 자식은 부모의 도구에 가깝다는 의미다.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적 가족 관계가 관계적 가족으로 이행하지 못한 것은 재산의 대물림 관행과 더불어 자녀를 대리 만족 내지 투자 대상으로 인식하는 풍조 때문이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초등학교 4학년 대상 의대 입시반까지 생길 정도로 번창한 사교육 시장, 집중력 향상을 위해 청소년들에게 약물성 드링크까지 먹이는 교육열, 주택을 위시한 자녀들의 기초 생활 인프라를 일거에 구축해 줄 수 있는 경제력, 그리고 출가한 자녀들이 계속 강남에 살 수 있도록 상대 ‘배후자’(배우자가 아님·구해근 ‘특권 중산층’)를 같은 강남에서 물색하는 혼인 전략은 ‘강남스타일’ 계급 재생산의 대표적 레퍼토리다. 이 점에서는 진보·보수 차이도 없다. 이런 가운데 이른바 인생 로또에서 ‘부모 뽑기’에 실패한 대다수 청년의 좌절감과 박탈감은 깊어져만 간다.
1970년대 중반 ‘월튼네 사람들’이라는 외화(外畵)가 국내에서 방영된 적이 있다. ‘전원일기’류의 훈훈한 가족 드라마였는데, 10여 년 뒤 미국 유학 시절, 우리말 더빙 없는 원작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극중(劇中) 대사에서 한국식 경어(敬語)가 사라지자 미국의 가족 내 인간관계는 친구처럼 편한 모습으로 달라져 보였다. 실제 서양 가정은 대개 그렇다. 최소한 그때는 그랬다. 가족들이 서로를 도구화하는 대신 각자 주체적·자립적 삶을 지향한다. 부모 자식 간에 특히 의존할 일도, 별로 기대할 일도 없다. 주거비나 양육비 부담이 청년들의 사회 진출 문턱을 터무니없이 높이지도 않는다.
한국의 가족 제도가 자랑하는 효 문화에는 거래적 측면이 은밀히 작동해 왔다. 언제부턴가 그게 점점 심해져 효는 조만간 가족 간에 주고받을 것이 많은 일부 부잣집 윤리로만 재정의될지 모른다. 작금의 효 문화로는 모두 패자가 될 공산이 높다. 못난 부모를 만나 이번 생은 망했다고 한탄하는 흙수저가 물론 많지만, 잘난 부모 탓에 인생이 망가졌다고 원망하는 금수저도 적지 않다. 우리 사회가 비혼을 줄이고 출산을 늘리려면 과도한 도구적 가족주의와 헤어질 연습부터 해야 한다. 덤으로 사회 갈등의 감소까지 기대할 수 있다. 당연히 이는 내 자식 내 마음대로, 내 재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기득권 사회 지도층이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 그들 자신도 국가 공동체 안에서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워낙 그런 의미다.(조선일보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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